폭스바겐, 독일 생산 88년 만에 '완전 중단'…드레스덴 공장, AI 캠퍼스로 '파격 변신'
폭스바겐이 독일 드레스덴 공장의 차량 생산을 88년 만에 완전히 중단하고 AI 혁신 허브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중국 판매 부진, 유럽 수요 둔화, 미국 관세 압박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투자 축소와 생존 전략 변화를 모색한 결과였다.
유럽 최대 완성차 업체 폭스바겐이 독일 생산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12월 16일(현지시간)을 기준으로 드레스덴 공장의 조립 라인이 가동을 멈춘다. 1937년 이후 이 땅에서 차를 만들어온 88년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다. 이는 단순한 구조조정을 넘어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격변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읽혔다.
독일 생산 완전 폐지, 불가피한 선택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드레스덴 공장은 독일 내 폭스바겐 브랜드의 처음이자 유일한 '전면 폐쇄 생산 부지'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폭스바겐은 노조와의 합의 과정에서 "독일 내 공장 폐쇄는 없다"는 약속을 남겼으나, 드레스덴은 예외적으로 생산 기능을 완전 중단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이 결정은 경제논리의 산물이었다. 2002년 가동 이후 드레스덴 공장은 누적 20만 대 미만의 차량을 생산했으며, 이는 주력 생산지인 볼프스부르크 공장의 반년 물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생산 효율성만 놓고 보면 폐기할 대상이었고, 경영진은 더 이상 이 시설을 유지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토마스 셰퍼 폭스바겐 브랜드 최고경영자는 "드레스덴 공장 폐쇄는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필수적인 결정"이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에는 불가피성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이 묻어났다.
시장 압박의 완벽한 폭풍
드레스덴 폐쇄는 폭스바겐이 직면한 3중 위기의 결과물이었다. 중국 시장은 이미 붕괴 수준이었다. 2019년 40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자랑하던 폭스바겐은 2024년 300만 대 아래로 추락했으며, 특히 저가 시장에서는 BYD 같은 중국 전기차 업체에 완벽하게 잠식당했다. 2024년 중국 판매는 전년 대비 8.3% 감소했고, 올해도 계속 하락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유럽은 더 이상 성장 시장이 아니었다. 유럽 판매량도 1.7% 하락했으며, 경기 둔화와 전기차 수요 부진이 겹쳐 있었다. 미국은 관세의 무기가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폭스바겐은 연간 최대 50억 유로의 비용 부담을 안게 됐다.
최고재무책임자 아르노 안틀리츠는 2025년 순현금흐름이 제로에 근접할 수 있다고 시사했으며, 애널리스트들도 이런 압박이 2026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현금이 마르는 상황에서 저효율 공장을 유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투자 축소와 생존 전략의 변화
폭스바겐의 5개년 투자 예산은 2024~2028년 기준 당초 1,800억 유로에서 1,600억 유로로 줄었고, 이 수치는 매년 조정되는 '롤링 투자'로 계속 변동할 수 있다. 2030년까지의 새 투자 계획도 1,600억 유로(약 230조 원)로 설정되어, 전년도 1,800억 유로에서 200억 유로가 감축된 것으로 확인됐다.
경영진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현실은 냉혹했다. 전기차 전환이 예상보다 느려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곧 내연기관 기술의 수명이 길어진다는 뜻이며, 차세대 가솔린과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에 추가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에너지 전환의 미래가 불확실해진 현 시점에서, 회사는 멀티파워트레인 시대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번스타인의 스티븐 라이트먼 애널리스트는 이를 명확하게 진단했다. "그룹이 지출을 더 줄이고 영업이익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였다. 현금을 아끼고 운영 효율을 날카롭게 다듬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경고였다.
35,000명의 일자리 소실
노조와의 합의로 폭스바겐 브랜드 한 곳에서만 35,000개의 일자리가 감축된다. 독일 직원 12만 명의 약 30%에 달하는 규모다. 이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며, 폭스바겐의 감원은 독일 전역의 공급망과 지역 경제에 직결된 문제로 지목됐다.
드레스덴 공장 폐쇄도 이 구조조정 계획의 일환이다. 폭스바겐 그룹 전체로는 드레스덴 공장과 오스나브뤼크 공장에서 늦어도 2027년까지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여 독일 내 생산능력을 연간 734,000대 축소하기로 합의했다.
아름다운 투명 공장의 새 인생
드레스덴 공장은 일반 자동차 공장과는 달랐다. 2002년 개장할 당시부터 건축학적 경이로움으로 불렸다. 폭스바겐의 제국을 건설한 페르디난드 피에히가 설계를 감시한 이 시설은 캐나다 단풍나무 마루, 부드러운 간접 조명, 5개의 축구장 크기만큼의 유리벽을 갖춘 '투명 공장(Gläserne Manufaktur)'이었다.
초기에는 럭셔리 세단 페이톤의 조립을 담당했으며, 페이톤이 2016년 단종된 이후에는 전기차 ID.3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이제 이 공장은 차를 만드는 장소가 아닌 미래 기술을 연구하는 요새가 될 예정이다.
폭스바겐은 드레스덴 공과대학교와의 협력 아래 이 부지를 AI, 로봇공학, 반도체 설계 분야의 혁신 허브로 변환하기로 했다. 2030년까지 7년에 걸쳐 5,000만 유로 이상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으며, 드레스덴 공과대학교가 부지 절반을 차지하는 혁신 캠퍼스가 조성될 예정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폭스바겐이 전통적 자동차 생산의 시대를 마감하고, 차세대 모빌리티의 뇌를 개발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선언이다. 공장 용지가 대학과의 협업 연구 거점으로 탈바꿈됨으로써, 회사는 제조 비용의 감소와 동시에 인재 파이프라인 확보라는 실리적 이득도 얻게 됐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단순화할 수는 없다. 폭스바겐은 여전히 유럽 최대 완성차 업체이며 세계 주요 자동차 제조사다. 하지만 드레스덴의 폐쇄는 회사가 더 이상 독일의 저비용 생산지를 신뢰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유럽의 높은 인건비와 에너지 가격은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과제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 전기차 업체들의 약진은 폭스바겐이 기술 리더십을 빠르게 잃고 있다는 신호다. BYD가 저가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안, 폭스바겐은 고급 시장에서도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독일 자동차의 합리성과 품질이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럼에도 폭스바겐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1,600억 유로의 투자 계획은 AI와 유럽 중심의 기술 인프라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독일과 유럽 내에서 경쟁력 있는 가격대의 차량 개발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드레스덴의 변신은 그 시작점일 뿐이다.
88년의 생산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 폭스바겐은 새로운 미래를 기거하고 있다. 그것이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회사는 현실을 직시하고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이자, 또 다른 장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