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차로 출발했지만..." — 대우 에스페로, 시대를 앞선 디자인이 몰고 온 영광과 좌절
중형차 시장에 도전한 대우 에스페로. 1990~1997년 과감한 이탈리아식 디자인과 독자 엔진 개발에도 불구, 품질 문제와 시장 혼란에 부딪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0년 9월 2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신차 발표회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대우자동차가 1986년부터 무려 4년간 1,3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해 개발한 첫 고유 모델 '에스페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어로 '희망하다', '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 차명에는 현대자동차 쏘나타에게 중형차 시장을 빼앗긴 대우자동차의 절박함과 재기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에스페로의 운명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화려한 디자인과 혁신적 기술로 무장했지만, 결국 1997년 2월 후속 모델 누비라에게 자리를 내주며 단종되기까지 총 7년의 짧은 생을 살았다.
이탈리아 명가의 손길, 시대를 앞선 혁명적 디자인
에스페로의 가장 큰 화제는 디자인이었다. 대우자동차는 란치아 스트라토스를 디자인한 이탈리아의 세계적 카로체리아(디자인 스튜디오) 베르토네(Bertone)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6만 파운드(약 8,000만 원)의 계약금을 지불하고 대우 디자이너들과 설계진을 이탈리아로 파견해 공동 작업을 진행한 결과, 당시 국산차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스타일이 탄생했다.
에스페로의 전면부는 충격 그 자체였다. 라디에이터 그릴을 완전히 제거한 '노 그릴(No Grill)' 디자인은 당시 국산차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보닛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카롭게 윈드실드로 이어지는 매끈한 평면으로 처리되었고, 사다리꼴 형태의 헤드라이트는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강조했다. 차체 측면을 보면 캐릭터 라인 하나 넣지 않고도 매우 날렵한 형상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쐐기형(Wedge Shape) 디자인 철학에 따라 앞부분보다 뒷부분을 높게 들어 올린 결과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C필러 부분을 유리로 감싼 '풀 슬랜트 리어 글래스' 구조였다. 이는 같은 시기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시트로엥 XM, 잔티아와 유사한 디테일로, 에스페로의 가장 인상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다만 당시 대우자동차의 기술적 한계로 후방 시야 확보를 위해 2열 유리창에 분할 바를 넣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깔끔한 디자인의 옥에 티로 지적받았다.
0.29Cd, 18년간 깨지지 않은 전설
에스페로가 달성한 공기저항계수 0.29Cd는 1990년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수치였다. 이는 같은 시기 출시된 BMW 850i와 동일한 수준이었으며, 무려 2008년 현대 제네시스 BH가 0.27Cd를 기록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국산차 중 최저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차체 범퍼 아래쪽에 설치된 에어댐은 차량 하체의 소용돌이를 억제하며 공기역학적 효율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놀라운 기술적 성과는 마케팅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당시 일반 소비자들에게 '공기저항계수'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이것이 연비와 고속 주행 안정성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는 TV 광고에서 F-14 톰캣 전투기와 경주하는 에스페로를 보여주며 공기역학적 우수성을 강조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1990년 9월, 야심찬 출발과 예상치 못한 시련
1990년 9월 26일 에스페로가 처음 출시될 당시, 차체에는 르망 임팩트에 쓰였던 2.0리터 CFI(중앙연료분사) 엔진이 탑재되었다. 최고출력 100마력, 최대토크 16.2kg·m의 이 엔진은 0~200m 가속 시간 10.5초의 성능을 발휘했으며, 연비는 수동변속기 기준 13.5km/ℓ로 동급 최고 수준이었다. 가격은 수동변속기 모델 960만 원, 자동변속기 모델 1,055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출시 직후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엔진 불량이었다. 부품의 정밀도가 떨어져 엔진 오일이 새거나 노킹 현상이 발생하는 차량이 속출했고, 급가속 시 소음과 진동이 심하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는 대우자동차 첫 고유 모델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초기 판매 부진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로터스의 도움으로 탄생한 '한국형 DOHC' 엔진
위기에 빠진 대우자동차는 영국의 로터스(Lotus)에 자문을 구했다. 이를 통해 1991년 2월 대우 최초의 자체 개발 1.5리터 DOHC 엔진이 탄생했다. 이 엔진은 최고출력 100마력에 최대토크 14.8kg·m을 발휘했으며, 한국의 저지형 도로와 중저속 주행 환경에 최적화되어 '한국형 DOHC'로 불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엔진이 하마터면 국내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이 될 뻔했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가 알파 엔진 개발 완료를 1개월 먼저 발표하면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현대에게 돌아갔지만, 실제 시판은 에스페로 DOHC가 1991년 2월로 더 빨랐다.

1991~19996년, 끊임없는 진화와 변신
1991년 11월, 1992년형 에스페로가 출시되며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졌다. 초기형의 독특했던 테일램프는 콤비네이션 타입으로 변경되었고, 헤드라이트 사이 허전했던 공간에 에스페로 전용 엠블럼이 추가되었다. 시트 재질이 고급화되었고, ABS와 CD Pack이라는 고급 옵션도 생겼다. 1992년 11월에는 1.6리터 LPG 택시 모델도 추가되어 영업용 시장에도 진출했다.
1993년 4월 출시된 1993년형에서는 115마력 2.0리터 MPFi(다점연료분사) 엔진이 추가되었다. 알루미늄 휠 디자인이 변경되었고, 파워윈도우 스위치가 중앙 집중식에서 운전석·조수석 분리형으로 바뀌었으며, 파워 안테나 위치도 조수석 측 프론트 펜더에서 운전석 측 리어 펜더로 이동했다.
하지만 2.0리터 MPFi 모델은 자사 중형차 프린스와의 판매 간섭 때문에 실적이 미미했다. 결국 1994년형부터는 110마력 1.8리터 MPFi 엔진으로 대체되었다. 이 엔진은 배기량은 줄었지만 최고속도 185km/h, 제로백 9~10초대의 성능을 유지하며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중형인가, 준중형인가? — 포지셔닝의 혼란
에스페로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시장 포지셔닝이었다. 출시 당시 대우자동차는 에스페로를 '신중형 세단'으로 내세우며 현대 쏘나타를 겨냥했다. 전장 4,615mm, 전폭 1,718mm, 축거 2,620mm의 차체는 중형차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작았지만, 당시 준중형차보다는 확실히 컸다.
문제는 내부 간섭이었다. 대우의 기존 중형차 로얄 프린스와 배기량과 가격대가 겹치면서 판매량이 양분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 10월 현대 엘란트라가 준중형 시장을 개척하며 등장했고, 1992년 기아 세피아까지 가세하면서 에스페로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대우자동차는 1991년부터 에스페로를 준중형으로 재포지셔닝하는 전략을 택했다. 1.5리터 DOHC를 주력 트림으로 내세우고 엘란트라, 세피아와 직접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프린스는 중형, 에스페로는 준중형으로 시장을 분리하며 두 차량 모두 판매량이 정상화되었다.
F-14 전투기와 미스코리아 — 파격 마케팅의 시대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 마케팅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탑건(Top Gun)'을 오마주한 TV 광고였다. F-14 톰캣 전투기와 함께 사막 활주로를 질주하는 에스페로의 모습은 "Take My Breath Away"를 비롯한 탑건 OST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설정이었지만, 에스페로의 날렵한 디자인 덕분에 F-14와 놀랍도록 잘 어우러졌다.
1993년에는 더욱 파격적인 전략이 등장했다. 대우자동차가 미스코리아 대회를 후원하면서 '미스 에스페로'를 선발한 것이다. 이는 김우중 회장의 부인이자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이었던 정희자 여사가 착안한 아이디어로, 미스 에스페로로 선발된 장미호는 대우자동차 광고에 전속 출연하며 에스페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또한 출시 당시 100명의 품질 평가단을 모집해 에스페로를 1년간 무료로 타게 해주는 캠페인도 진행했다. 이는 훗날 GM대우와 한국GM으로 이어지며 대우자동차의 전통적 마케팅 기법이 되었다.

해외에서는 대성공 — 폴란드가 증명한 에스페로의 가치
국내에서는 고전했지만, 해외 시장에서 에스페로는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았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총 생산량 546,520대 중 무려 236,882대(43%)가 수출되었다. 폴란드,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호주, 브라질 등 다양한 시장에서 가격 대비 세련된 디자인과 풍부한 장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폴란드에서의 성공은 눈부셨다. 1995년 11월 14일, 대우자동차는 폴란드 국영자동차 기업 FSO의 주식 70%를 인수해 경영권을 획득했다. 이는 미국 GM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이룬 성과였다. 지난해 말 인수가 발표 당시 1억 4천만 달러(약 1,400억 원 상당)라는 보도가 있었으며, 대우는 현지 인력을 단 한 명도 줄이지 않고 2002년까지 10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파격적 공약을 내놨다.
대우-FSO는 1996년 3월부터 에스페로와 티코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불과 7개월 만에 3만 대를 판매하며 폴란드 자동차 판매 1위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 성공한 사람은 에스페로를 탄다"는 광고 문구가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에스페로는 동구권 시장에서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1995년에는 영국의 자동차 전문지 '오토 익스프레스(Auto Express)'가 실시한 경제형 세단 비교 시승에서 도요타 카리나, 스바루 임프레자, 복스홀 캐벨리에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비록 후에 내구성 문제가 제기되며 결과가 뒤집어졌지만, 대우의 첫 고유 모델이 받은 평가는 한국 자동차 업계에 큰 의미를 지녔다.

1997년 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에스페로의 마지막은 갑작스러웠다. 1997년 2월, 대우자동차는 새로운 준중형 세단 누비라(Nubira)를 출시하며 에스페로의 단종을 발표했다. 누비라는 에스페로의 공식 후속 모델로, 이탈리아 이데아(IDEA)의 프랑코 만테가차가 디자인을 맡았으며, 대우 군산공장에서 생산된 첫 차량이었다.
에스페로가 단종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첫째, 초기 엔진 불량으로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를 끝까지 벗지 못했다. 둘째, 중형과 준중형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포지셔닝은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셋째, 시대를 너무 앞서간 파격적 디자인은 보수적인 국내 소비자들에게 어색하게 받아들여졌다. 넷째, 엘란트라와 세피아라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등장하면서 시장 입지가 좁아졌다.
국내에서는 1997년 2월 단종되었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더 오래 생산되었다. 폴란드에서는 2000년까지, 루마니아에서는 1999년까지, 브라질에서는 1998년까지 생산이 계속되었다. 일부 시장에서는 '아라노스(Aranos)'라는 이름으로도 판매되었다.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 — 에스페로는 왜 추억되는가
출시 35년이 지난 지금도 에스페로는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다시 출시했으면 하는 차', '가장 기억에 남는 국산차'로 수십 년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 무쏘, 기아 뉴 코란도와 함께 '역대급 디자인의 국산차'로 꼽히며, 시대를 앞선 설계로 국내 세단 시장의 상품성을 격상시킨 모델로 평가받는다.
2020년대 들어 뉴트로(New-tro) 열풍이 불면서 에스페로를 전기차로 부활시켜달라는 팬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부 마니아들은 보존 상태가 좋은 에스페로를 복원해 올드카 모임에서 자랑하기도 한다.
에스페로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선다. 대우자동차가 GM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 모델을 개발하려 했던 도전정신, 세계적 디자인 하우스와 협업해 시대를 앞서간 스타일을 창조한 혁신성, 그리고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으며 한국차의 가능성을 증명한 선구자적 역할 — 이 모든 것이 에스페로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현대 엘란트라나 기아 세피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에스페로는 한국 자동차 산업이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90년 가을, 희망을 품고 세상에 나왔던 그 차는 7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35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시대를 앞서간 명차'로 영원히 남아있다.